제인 모리스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이자 시인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는 미술과 문학을 오가는 뛰어난 천재성으로도 유명하지만, ‘치명적인 사랑’의 행로와 그 행로에서 만난 모델들과의 특별한 관계로도 유명한 화가다.


단테 가브리에 로제티의 초상 사진, 1863년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이탈리아 이민의 아들로서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시와 문학을 좋아했는데, 로제티의 이름에 단테가 들어간 것도 평생 시인 단테에 깊이 심취했던 아버지의 취향이 작용한 것이었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로제티가 문학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로제티는 스무살 무렵에 이미 상당수의 이탈리아 시를 영어로 번역했으며, 여러 편의 자작시를 썼다. 아버지는 정치적인 이유로 영국에 망명해 오기 전, 나폴리에서 작곡가 로시니의 가극 작사가로 일하기도 했고,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기도 했다. 이민 와서는 교사 생활 끝에 킹스칼리지의 이탈리아 어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로제티의 재주가 다방면으로 꽃 필 수 있는 수원지를 이렇듯 아버지의 직업 편력이 제공했던 것이다. 로제티는 학업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성취도도 낮았지만, 이런 지적인 가정 분위기와 남다른 독서열로 잠재력을 활짝 꽃피울 수 있었다.

로제티의 아내 엘리자베스 시달은 그에게 구원의 여인 같은 모델이었으나, 시달이 마약 과다 복용으로 자살한 데서 알 수 있듯 둘 사이에는 사랑과 배신, 갈등의 복잡한 드라마가 존재했다. 시달이 자살한 날 로제티는 파니라는 여인과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매춘부 출신의 이 여인은 로제티 가족들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로제티의 애정과 경제적 후원의 대상이었다. 로제티는 그녀 또한 열심히 화폭에 담았다.

로제티는 심지어 절친한 친구 부인과도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그림 속에 그녀를 모델로 등장시켰다. 유명한 시인이자 공예가, 현대 디자인의 선각자인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 제인 모리스(Jane Morris, 1839-1924)가 바로 그 여인이다. 친구의 속을 뒤집어 놓았으면서도 로제티는 “사랑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어쩌면 이처럼 ‘이기적인 사랑의 에너지’가 있어 남다른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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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시달의 초상 사진, 1860년경

로제티, [베아타 베아트릭스], 1872년, 캔버스에 유채, 86x66cm, 테이트 브리튼, 런던로제티의 부인 엘리자베스 시달을 모델로 한 그림이다. ‘리치’란 애칭으로 불린 시달은 특별히 로제티의 연모의 대상이 되어 결국 백년가약을 맺기에 이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혼 이태만에 리치가 사망함으로써 로제티는 그 사랑의 아픔과 기억을 이 작품으로 승화시키게 되었다.
녹색조와 갈색조의 톤이 두드러진 화면에 기도하듯 조용히 눈을 감은 여인. 리치다. 붉은 새 한 마리가 다가와 죽음의 상징인 양귀비꽃을 그녀의 손에 떨어뜨린다. 리치의 뒤쪽으로는 피렌체 시가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녹색 옷을 입은 남자가, 왼편으로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보인다. 시인 단테와 그가 사모한 베아트리체다. 로제티가, 리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사랑에 비유해 표현한 것이다. 참으로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러나 이 ‘사모곡’의 뒤를 파헤쳐 보면 거기에는 남모를 비극이 있다. 로제티는 리치와 일찍 약혼을 해 놓고는 결혼을 계속 미뤘다. 그 사이에 여러 여인들과 연애를 했는데, 동료 화가 홀맨 헌트(Holman Hunt)의 약혼녀와 밀회를 가져 우정을 깨뜨리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일들로 인해 결혼이 자꾸 미뤄지니 리치는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듯하다.
로제티가 리치와의 결혼을 결심한 것은, 건강이 약해진 그녀가 그리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한 1860년의 일이었다. 만난 지 11년째 되는 해였다. 결혼 이듬해 리치는 딸을 사산했다. 이후 리치는 아편으로 만든 약물인 아편틴크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1862년 남편과 외식을 한 후 아편틴크 과다 복용으로 숨졌다. 당시의 관행에 따라 ‘사고사’로 처리되었지만, 사실상 자살을 한 것이다. 왜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그 한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분명 로제티의 행실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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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이, [오필리아], 1852년, 캔버스에 유채, 112x76cm, 테이트 브리튼, 런던
로제티의 [베아타 베아트릭스]와 함께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리치를 모델로 해서 그린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을 찾는 관객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화가 밀레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4막 7장을 소재로 이 그림을 그렸다. 연인 햄릿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됨으로써 미쳐버린 오필리아가 지금 꺾은 꽃을 쥔 듯 띄운 듯 물 위에 누운 채 이승을 떠나려 하고 있다. 오필리아의 가련하고 순결하며 창백한 표정은 리치라는 모델을 통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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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사랑의 여신


제인 모리스의 초상 사진, 1865년

로제티가 1875-77년 사이에 제작한 [아스타르테 시리아카(Astarte Syriaca)]는 제인 모리스를 모델로 해서 그린 여러 점의 그림 가운데 하나다. 아스타르테는 고대 근동 지방의 여신이다. 사랑과 전쟁의 신인 이 여신은,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아스타르테의 유대식 이름)과 암몬 사람의 우상 밀곰을 따라가서 주 앞에서 악행을 하였다”(열왕기상 11:5-6)는 성경 기록에도 나오듯 고대 지중해 일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신이다.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아르테미스, 헤라 여신이 종종 이 여신과 동일시되었을 정도로 지중해 여신상의 원형적인 성격을 지닌 여신이다. 신화와 전설, 종교, 사랑과 예술을 한데 버무리는데 능한 로제티에게 이 원형질의 여신은 그만큼 매력적인 존재로 다가왔다. 로제티는 이 여신의 모델로 주저 없이 제인 모리스를 선택했다.

아래 그림에서 아스타르테 여신은 매우 고혹적인 눈길로 관객을 바라본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 시원시원한 뼈대가 이 ‘이교도 여신’의 관능과 매력을 생생히 전해준다. 이런 특징은 제인의 특징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제인 역시 요즘으로 치자면 ‘보이시’한 매력이 가미된, 개성적인 미인이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복숭아처럼 작고 어여쁜, 또 크림같이 달콤한 여인을 미인으로 여겼기에 그녀의 아름다움은 관객에게 때로 ‘투박하고 부담스러운’ 것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녀를 그린 화가들은 이를 상쇄하기 위해 곧잘 나른하고도 우울한 분위기를 그녀에게 덧씌우곤 했다. 이 그림에서도 그런 뉘앙스가 어느 정도 느껴진다. 어쨌든 당시의 미적 기준에서는 다소 벗어났지만, 눈에 띄는 아름다움을 가졌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런 그녀에 대해 「더 타임스」는 부고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녀는 아름다움으로 유명해졌다. 드문 아름다움이요, 돋보이는 아름다움이었다. … 모든 사람이 그녀의 덩어리진 검은 머리와 아름다운 손, 그리고 회색 눈동자를 알고 있다. 거기에는 매우 독특하고 압도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림 속의 아스타르테는 가슴 아래와 허리에 두른 띠를 두 손으로 만지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 금속 띠는 장미와 석류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표적인 기독교 도상으로서 장미와 석류는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과 부활을 상징한다. 이를 이 여신의 지배 영역인 사랑에 근거해 해석한다면, 사랑의 열정(passion)과 영원히 되살아나는 사랑의 속성쯤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여신 뒤의 두 수행원도 결코 꺼지지 않을 횃불을 들고 이 사랑의 여신을 찬미한다. 이런 이미지들을 통해, 솔로몬이 이 여신을 좇아 야훼 신 앞에서 악행을 행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처럼, 로제티 역시 모든 것을 그녀에게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 무엇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사랑의 여신, 그런 마력적인 존재로 로제티는 제인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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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티, [아스타르테 시리아카(Astarte Syriaca), 1875-77년, 캔버스에 유채, 183x106.7cm, 맨체스터 시립 미술관제인 모리스는 키가 크고 늘씬할 뿐 아니라 매우 튼튼해 보이는 용모를 지녔었다. 머리카락은 짙은 데다 숱이 많았고, 안색은 창백한 편이었으며, 표정은 침착하고 다소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그림이 보여주는 인상이 바로 그와 같다. 티치아노의 기법을 좇아 표면 광택을 살려줌으로써 그 인상을 보다 영롱하고 신비스럽게 승화시켰다.

로제티, [마리아나], 1868-70년, 캔버스에 유채, 109.2×88.9cm, 애버딘 미술관그림의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이척보척(以尺報尺(응보), measure for measure)』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마리아나가 수예를 하고 있고, 배경에서 한 소년이 노래를 하고 있다. 비록 바늘과 실을 잡고 있으나 마리아나의 생각은 딴 데 가 있다. 소년의 노래가 그녀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소년의 노랫말은 그림의 액자에 새겨져 있는데, 사랑의 맹세를 저버린 이에 대한 원망을 노래한 것이다. 마리아나는 지금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저버린 안젤로를 떠올리고 있다.
제인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가 침울한 마리아나의 모습에 잘 투영되어 있다. 푸른색의 드레스가 그녀의 신비를 북돋아 주는 한편 배신감으로 차가워진 내면의 풍경 또한 생생히 전해준다.

사랑을 빼고 모든 것을 손에 쥐다

제인은 1839년 마구간지기였던 아버지 로버트 버든과 세탁부였던 어머니 앤 메이지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빈곤 속에서 성장한 그녀는 17살 때 우연히 라파엘 전파 화가들과 만나게 되어 모델을 서 줄 것을 요청받는다. 제인은 로제티, 번 존스 같은 라파엘 전파 화가들뿐 아니라 이들과 친했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96)를 위해서도 모델을 섰다. 미술공예운동의 주도자로 유명한 윌리엄 모리스는 당시 건축에 대한 흥미를 잃고 로제티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제인을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이로 인해 제인은 모델 일을 그만두고 1859년 윌리엄 모리스와 결혼하게 된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윌리엄 모리스는 제인과는 반대로 런던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디자이너, 공예가, 시인, 사회주의 개혁가로서 19세기 영국이 배출한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의 하나라고 불리게 될 인물이니 제인으로서는 신데렐라의 꿈을 이룬 격이었다. 제인이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어느 귀족집이나 부잣집의 하녀 일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제인이 평생 모리스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아마도 지긋지긋한 가난과 계층적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리스의 청혼을 받아들인 듯하다.

약혼 뒤 제인은 상류층 부인이 되기 위한 교양과 매너 수업에 매진했다. 머리가 비상했던 제인은 이 과정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자신을 거의 재창조했다. 얼마나 책을 열심히 읽고 공부했는지 곧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 능숙해졌다. 피아노 연주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이게 되었고, “여왕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우아한 귀부인의 자질을 갖추었다.

그녀의 품격에 반한 버넌 리가 그녀를 모델로 『미스 브라운』(1884)을 썼고, 『미스 브라운』에 나온 캐릭터에 영감을 받아 버나드 쇼가 희곡 『피그말리온』(1914)을 썼으며, 이에 기초해 뮤지컬과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가 나오게 되었으니, 그녀는 한 시대의 아이콘 같은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리스와 결혼을 하고 난 뒤 제인은 뛰어난 바느질 솜씨와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남편이 운영하던 모리스 상회의 여러 수예, 장식 사업에 기여하는 한편, 주문들을 직접 관리, 감독하는 일에 나서기도 했다. 그 사이에 딸 둘을 얻어 이제 외적으로 볼 때 행복한 삶의 조건을 다 갖춘 듯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사랑이 문제였다.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없으니 모리스와의 사이가 그리 원만할 수 없었다. 부부간의 정서적인 결합이 끝내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1868년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사람이 바로 로제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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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모리스의 초상 사진, 1887윌리엄 모리스는 존 러스킨의 영향을 크게 받아 산업혁명에 기초한 기계화와 대량생산이 생활 속의 아름다움을 파괴할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중세적인 장인정신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작업 형식을 되살리려고 미술공예운동을 일으켰고, 1861년 모리스 마샬 & 포크너 회사를 설립해(1875년부터는 모리스가 단독으로 경영하는 모리스 회사가 되었다) 벽지, 텍스타일, 스테인드글라스, 가구, 금속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을 다뤘다. 명실 공히 현대 디자인의 선구가 된 회사라 할 수 있다. 모리스는 살아생전 시인으로 유명했으나 죽은 뒤에는 디자이너로서 더욱 유명해졌다.

모리스, [아름다운 이졸데], 1858년, 캔버스에 유채, 71.8×50.2cm, 테이트 브리튼, 런던모리스가 제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그림이다. 주제는 유럽 연애문학의 전형이 된 트리스탄과 이졸데(이죄) 이야기에서 가져왔다. 이 이야기의 유래는 켈트 족의 옛 전설로, 12세기 중엽에 프랑스에서 시가로 엮여졌고, 이후 수많은 문학적 변주를 거쳐 전 유럽에 보급되었다. 그림의 장면은, 침대에서 막 일어난 이졸데가 상념에 잠겨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머리에 기억을 상징하는 로즈메리 잔가지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트리스탄을 떠올리는 것 같다.
모리스는 성실한 붓놀림으로 제인의 특징을 고스란히 이졸데에 반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화가로서는 아직 그리 능숙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사람의 피부와, 그 아래의 뼈와 근육을 표현하는데 다소 서툰 인상을 준다. 하지만 세세한 장식이나 무늬를 그리는 데는 남다른 집중력과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애당초 그가 화가보다는 디자이너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았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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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스틸 컷
1964년에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는, 하층민인 꽃 파는 아가씨가 일정 기간 동안 언어학자의 교습을 받아 우아하고 세련된 귀부인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의 뮤지컬이다. 바로 제인 모리스의 이야기가 그 골간이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을 맡아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그때 오드리 헵번이 입었던 드레스가 2011년 한 경매에서 3백7십만 달러(41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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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사랑

로제티는 제인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의 외모에 반했다. 늘 변함없는 그녀의 예찬자로 남아 있다가 그녀가 친구 모리스와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연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제인이 로제티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시인이기도 했던 로제티는 이 무렵 그녀를 찬미하는 소네트를 집중적으로 쓰고 이를 다른 시들과 묶어 출판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렇듯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안 라파엘 전파 화가들과 지인들은 술렁거렸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갈등도 없는 듯 당사자 모두 예의를 차렸다. 윌리엄 모리스는 속으로야 불편했지만 지식인다운 자제력과 관용으로 상황을 관망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다. 그는 로제티와 공동으로 켐스코트 영지를 임차해 쓰는 데 동의했고, 거기에서 제인과 두 딸이 여름철을 보내도록 했다. 공동 임차인으로서 로제티는 그곳에서 자연스레 제인과 만날 수 있었고, 자신의 뮤즈를 공개적으로 찬미하며 형상화하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부적절한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1872년 로제티는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된다. 10년 전 자신과의 불화 끝에 사별한 아내 엘리자베스 시달에 대한 죄책감이 이 무렵 더욱 증폭된 탓이 컸다. 1869년 로제티는 시집을 펴내기 위해 한 친구에게 아내의 관에 함께 묻어두었던 원고를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놀랍게도 시신은 생전 모습 그대로였으며, 머리카락이 자라 온몸을 뒤덮고 있는 까닭에 원고를 꺼내기 위해 그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로제티는 가뜩이나 시달려오던 불면증 증세가 갈수록 심해져 1872년에는 마침내 극심한 신경쇠약에 빠지게 된 것이다. 제인은 그런 그를 극진히 간호했다. 뭔가 자신들의 사랑에 암운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때 로제티가 제인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 유명한 [페르세포네](1874)다. 세로로 긴 그림 속에서 모델은 지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이처럼 깊은 사유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일까? 널리 알려져 있듯 페르세포네는 지하 세계의 왕 하데스가 강제로 납치해 자신의 부인으로 삼은 여인이다. 어머니 데메테르가 제우스에게 탄원한 덕분에 어머니와 다시 재회하게 됐으나, 지상에 오르기 전 지하 세계의 석류 씨 몇 알을 무심코 먹은 바람에 다시 매년 일정 기간을 하데스와 살아야 하는 운명에 빠졌다. 그림 속의 페르세포네가 왼손에 바로 그 석류를 쥐고 있다(오른손이 왼손을 제지하고 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무심코 한 자신의 행위가 인생의 행로를 이처럼 뒤죽박죽으로 바꿔놓을 줄을 페르세포네는 알지 못했다. 로제티는 자신과 남편 사이에서 깊은 혼란에 빠져든 그녀의 운명을 페르세포네의 그것에 비춰보고 싶었던 것일까?


로제티, [페르세포네], 1874년, 캔버스에 유채, 127x61cm, 테이트 브리튼, 런던
장식적인 곡선미가 유난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어깨에서 팔 아래로 이어지는 천의 주름은 풍성하고도 유려한 물결을 이루고 있고, 머리카락의 자잘하면서도 풍성한 웨이브는 매우 풍요로운 인상을 준다. 머리 뒤쪽에서 나와 창을 살짝 덮고 있는 아이비의 곡선이나 그림 왼쪽 아래 향로의 연기가 자아내는 곡선 모두 페르세포네의 곡선을 주위 공간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곡선의 유혹, 그 관능의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는 그림이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적은 글은 이탈리아어로 쓴 소네트인데, 제인에 대한 화가의 절절한 사랑과 고통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죽음만이 정리할 수 있었던, 질긴 인연의 끈

1876년 이후 제인과 로제티의 만남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불안에 시달리던 로제티가 마취성이 강한 최면제 수화클로랄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자 그 사실을 알게 된 제인이 로제티와 거리를 두게 된다. 그에 더해 제인의 큰딸 제니가 간질 증세를 보여 제인은 지속적인 간호를 위해 딸에게 집중하게 된다. 1880년에는 남편과의 관계도 부분적으로나마 회복이 되어 이후 부부는 함께 살게 된다. 비록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를 찾아간 듯했지만, 제인과 로제티의 관계가 완전히 청산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1882년 로제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남을 유지했다. 죽음만이 정리할 수 있는 질긴 인연의 끈이었다.

로제티와 사별한 제인에게 새로운 사랑으로 다가온 남자는 시인 윌프레드 블런트였다. 1884년 그와 처음 만난 뒤 곧 연인 사이가 되어 1894년까지 열정적인 사랑을 이어갔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로 남아 지속적으로 소통했다. 남편 윌리엄 모리스는 그 와중인 1896년 세상을 떠났다. 비록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남편 사후 제인은 윌리엄 모리스 기념관을 짓고 딸 메이가 편집한 윌리엄 모리스 작품집에 많은 도움을 주는 등 남편을 기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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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티, [라 돈나 델라 피네스트라], 1879년, 캔버스에 유채, 101×74.3cm, 하버드대 포그 미술관, 케임브리지1879년 그림이지만, 1870년에 그려두었던 제인의 스케치를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이탈리아어 ‘라 돈나 델라 피네스트라(La Donna Della Finestra)’는 영어로 ‘The Lady of Pity(동정의 여인)’를 뜻한다. 그 이름에 걸맞게 제인은 지금 관람자를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관람자의 위치가 곧 화가의 위치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인의 눈길은 결국 로제티를 향한 것이다. 1876년 이후 비록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예전만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두 사람. 로제티는 제인의 동정 어린 눈길을 갈구할 만큼 예전의 그녀가 그리웠던 것일까.
라 돈나 델라 피네스트라는 단테의 ‘신생’에 등장한다. 그녀는 베아트리체가 죽은 뒤 창밖으로 단테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낸 여인이다. 로제티의 이름이 단테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그는 분명 제인으로부터 이런 시선을 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배경으로 창이 등장한 것은 신생의 내용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꽃이 여인의 뒤를 두르고 있고, 무화과 나뭇잎이 앞에 포치되어 있어 장식적인 안정감이 돋보인다. 피부나 옷 처리에 있어 질감이 중시된 까닭에 로제티가 그림 속의 여인을 어루만지듯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로제티, [백일몽], 1880년, 캔버스에 유채, 157.5×92.7cm, 빅토리아와 앨버트 미술관, 런던이 그림 역시 로제티가 예전에 그려둔 제인의 드로잉을 토대로 제작한 그림이다. 원본이 된 드로잉에서 로제티는 제인을 자연이 지닌 창조성의 화신으로 표현했다. 자연의 창조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계절이 봄이라고 할 때 결국 제인은 봄의 화신인 셈이다. 그림의 제인은 시커모어 나무에 앉아 인동덩굴을 손에 들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 영국인들에게 인동덩굴은 사랑의 유대를 의미했다. 화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 식물에 투영한 듯하다. 그러나 그림의 타이틀이 백일몽이다 보니, 그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도 한갓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몸도 기력도 점점 쇠해가던 말년의 로제티에게는 지나온 모든 게 백일몽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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